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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을 위한 망상


박경리 : (나남, 2007, 총 341쪽) 新원주통신 가설을 위한 망상 1. 박경리 선생에게는 원주는 어떠한 도시인지 궁금하다. 궁금했었다. 글쓰기 위해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기 위해서 서울을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유명세로 인해 받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 돌연 잠적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면 그 말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박경리 선생의 산문집 <원주 통신-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나남, 1993)에서 우리는 선생의 원주행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원주로 박경리 선생을 이끈 것은 가족이었다. 산문집에서는 원주가 선생에게 큰 공간으로서 자리를 하고 있다. 2007년 새로이 발간된 <가설을 위한 망상>은 그러한 원주를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新원주통신 으로 수식을 하고 있다. <원주통신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에서는 원주 캠퍼스에서 선생께서 한 강의를 중점적으로 실려 있다. 그런 반면에 <가설을 위한 망상>은 대하소설 <토지> 이후 선생의 족적을 간추려 담고 있다. 선생의 소설이 비관적 휴머니즘에 근간을 두고 있다. <김약국의 딸들>과 <시장과 전장>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박경리 문학은 거대한 산맥 <토지>를 이루었다. 도시 지식인의 삶을 다룬 <표류도>, <나비와 엉겅퀴>, <성녀와 마녀>, <가을에 온 여인>등이 <토지> 4, 5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회의적 역사관과 능동적 사고가 깃들인 <김약국의 딸들>, <파시> 역시 토지 1, 2부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한 문학관이 박경리 선생의 현장 강의를 활자화한 것이 <원주통신-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이다. 젊은 문학도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를 담은 책이 <원주통신>이었다. 그리고 십 년도 훌쩍 넘긴 2007년에 <新원주통신>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원주에서 선생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명백히 설명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작가는 괴로워한다. 그 괴로워함과 근심함이 오늘날의 대작가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선생의 또 다른 산문집 <Q씨에게>에는 나는 선생이 바라는 삶이 관조 라 오해했었다. 하지만 좀 더 시일이 지난 뒤 만나게 된 <원주통신>에서는 일체, 하나 됨 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우치게 되었다. 능동적인 사고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선생의 말씀을 <원주통신>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서툰 독서 실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2. 현대문학 에서 <토지>이후의 소설이 실릴 때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 소설이 "나비야 청산 가자"이다. 일명 <토지> 그 다음 이야기로 통하는 "나비야 청산 가자"는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연재가 중단되었고 현재까지 박경리 선생은 그 소설에 얹을 힘이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나비야 청산가자"는 선생의 인생관, 세계관, 문학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설이다. 해연농장을 중심으로 주인공 해연이 겪는, 그 공간 속의 이야기로 전통 소설담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발단에서 인물의 성격으로 제시하고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잠복하고 있다. 그리고 부수적인 갈등이 하나씩 고개를 들고, 주인공 해연이 그 공간 속에서의 인물들로 인해 고통이 차츰 심화되는 과정에서 우선은 쉼표를 찍고 있다. <토지>를 처음 읽었을 때 서술자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는 부분이 여러 곳에 있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소설에 드러나면 안 좋은 글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러한 표현방식에 많이 당황했었다. 하지만, 과연 좋지 못한 글이었을까. 서술자의 목소리가 드러날 경우 서양극(소설, 연극, 영화)에서 무의식적으로 빠져드는 동일시, 극적 환상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의 판소리, 탈춤은 그래서 사회비판의 성격을 갖춘 탁월한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선생은 이러한 기법을 "나비야 청산 가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늦게나마 그러한 기법을 사용한 의도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나비야 청산 가자"는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거대한 서사를 앞두고 잠시 멈춰서 있다. 하지만 잠시 쉼일 뿐 종결은 결코 아니라 믿는다. 흙 묻은 선생의 손에서, 펜을 잡은 손끝에서 "나비야 청산 가자"의, 그 끝날 수 없는 서사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의 건강을 간절히 기원한다. 언어의 한계를 비통해하며 선생께서 창조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다시금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3. 3부에서는 마산 MBC에서 방송한 대담이 글로써 옮겨져 있다. 방영 당시 전국 방송을 타지 못하고 지역민만이 선택적으로 선생의 대담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전국 방송은 본방송이 아닌 재방송으로 방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내용이 3부에 실려 있다. 방송출연에 심한 회의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와 같은 방송에 용단을 내린 것은 아마도 건강이 좋지 못했던 당시의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송 초두에 말씀이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 말씀이 11년 동안 박경리 선생의 글과 함께한 지난 시간을 회오리처럼 솟구치게 만들었다. 가시려 하나 보다. 먼 길을 돌아서 가시려나 보다. 슬픔보다 앞선 고마움이 가슴을 쳤다. 그 말씀들이 거의 그대로 <가설을 위한 망상>에 <토지>완간 당시의 대담과 함께 실려 있다. 텔레비전 방송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대담( 쪽)>에서는 토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선생의 일상사를 만날 수 있다. <토지>는 누구나 읽고자 계획하지만 쉽지 않은 거대한 벽이라는 말 역시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분량과 거대서사 앞에서 독자는 스스로를 작다고 여겨 움츠리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 독자였던 나는 선생의 산문집과 <대담>은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은 생명이 끝에 선 자신을 보며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우리도 지금 <토지>를 읽지 못한다면 정말 다시없는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설을 위한 망상>을 구름판 삼아 다시금 <토지>를 만나려 계획해 본다. 토지사전,을 펼치며 재촉하지 않지만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에는 자신한다. 4. <가설을 위한 망상>. 가설은 무엇인가를 목적하기에 뼈대를 만드는 것이다. 가설(假說) : 실제로는 아직 타당성이 증명되지 않았으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상 내세우는 이론. 망상(妄想) : 이치에 어긋나는 헛된 생각. <가설을 위한 망상>에서 박경리 선생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표면에 뚜렷이 들어난다. 공생, 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다. 여기서 모두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억압과 죄악에서 선생의 시선은 전우주적으로 확장되어 있다. 생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갖으며 선생의 화두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인류가 과잉으로 만들어내는 무수한 노폐물들이 장차 인류에게 던져줄 자연의 보복에 대해서 경종을 울린다. 동학으로 시작한 <토지>가 동학 잔당이 연학의 눈물과 웃음으로 끝나듯이 <가설을 위한 망상>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잊지 말기를 바라는 선생의 당부가 가득 담겨 있다. (...)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 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 (솔출판사 토지 16권) 그리고 <토지>는 끝이 난다.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여기서 실구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래 생각해 볼일이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은 인간에 대한, 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실낱같이 거머쥐고서 여전히 망상을 하고 있다. 가설을 위한 망상을. 사람은 과연 육식동물에 지나지 않을까.
현대 소설사의 거대한 산맥, 작가 박경리. 세상과 떨어져 철저한 고독 속에 작품활동에만 매달렸던 박경리의 토지 이후 문학과 삶에 대한 생각들을 엿본다. 그동안 짬짬이 내놓아 흩어져 있던 산문들과 미완의 장편소설 〈나비야 靑山가자〉, 그리고 송호근 교수와 가졌던 두 번의 대담내용을 한데 엮었다.


〈산문〉
생명의 물길 되어 다시 흘러라
자연복원의 선진국
민을 위한 노심초사는 시공을 뛰어넘어
불모의 시기
다시 Q씨에게
다시 Q씨에게―妄想의 끝
가설을 위한 망상
선생님에 대한 추억
오십 년
숨소리 창간사
숨소리 작별인사
왜 쓰는가
설문―새로운 천년과 문학의 미래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

〈사회학자 송호근의 ‘작가 박경리’론〉
대담
작가를 찾아서―삶에의 연민, 恨의 美學(송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