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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저자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는 일종의 현실 고발서에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소비문화’뿐 아니라, 인간 쓰레기, 즉 소비할 수 없는 인간, 배제된 인간 역시 과감히 쓰레기의 범주 안에 넣는다. 이것이 특히 ‘기획’이나 ‘질서구축’과 같은 근대성이라는 특징과 연결된 현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질서 밖으로 빠지는 것, 또는 기획에서 배제되거나 미처 고려되지 못한 것들은 졸지에 ‘쓰레기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잉여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며, 언제나 영원히 소비자가 될 수 없는 소비불능자로서 잉여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는 급박한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서바이벌’, 다시 말해 배제되지 않고 ‘살아남기’, 즉 ‘생존’이다. 이는 마치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우리 신체에 포함되어 있는 한 사랑받고 존중받지만, 이것이 신체에서 이탈된 그 순간 바로 쓰레기로 전락한다는 사실과 유사하다. 이런 세계에서는 새로운 지식과 법이 질서의 기준으로 설정됨과 동시에 새로운 배제와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걸 아는가? 바로 쓰레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 말이다. 왜 가볼러지(Garbology)라는 학문, 즉 ‘쓰레기학’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이 학문의 모토는 이것이다. “여러분의 쓰레기를 한 달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럼 제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우리가 사는 곳과 우리시대의 정체를 달려주는 셈이기도 하다. 근대 초기에는 이러한 쓰레기나 쓰레기 인간(잉여인간)들은 흔히 수출되었다. 그것도 ‘제국주의’라는 이름하에.(그런 점에서 쓰레기의 생신이 근대성의 정체였던 거고, 제국주의는 이미 쓰레기가 예견했던 근대적 폭력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다.) 그러나 근대 후기에는 더 이상 이들을 수출할 수 없게 되자, 특정 국가 내부가 쓰레기로 넘쳐나게 된다. 그래서 이제 위험과 생존 안전과 같은 것이 ‘상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사람들은 이제 살아남기 위하여 ‘안전과 안정’을 욕구하게 되고, 이 욕구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해소하는 상품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울리히 벡이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했고, 루만이 사회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생존’을 꼽고, 아감벤이 ‘조에’가 주권개념과 관계된 생명정치를 중시한 것도 이런 시대상황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끊임없이 쓰레기가 생겨나고, 끊임없이 망명자나 난민 그리고 경제적 이주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폐기된 인간들이 생사여탈권에 놓이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설명하는 사람이 바로 아감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지에르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사람들의 견해에 의존하면서 거대기업가를 목축왕으로 테러리스트들을 노상강도로 분류하면서 이 두 사람들이 적대적 동업자이며 둘 다 인간 쓰레기 생산을 풍부하게 증가시킨다고 표현한다. 전자는 경제 발전 부분에서 쓰레기를 생산하고, 후자는 창조적 질서파괴라는 점에서 쓰레기를 양산한다고 표현한다. 쓰레기 인간들은 이들의 부수적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현재를 ‘전지구의 변방화’로 선언한다. 마치 아감벤이 전지구가 ‘수용소’가 되었다는 선언과 유사하게 말이다. 더 이상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이제 언제든 빚에 쪼들리는 잉여인간의 노예상태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문화를 통틀어 쓰레기 문화라 표현할 수 있는데, 이런 문화 속에서 인간관계 역시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한다. 영원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언제든 파기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영원하다. 여기서 인간은 관계의 안정망을 유지하려 하는데, 이것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속에 사는 인간들은 언제나 우울하다. 이를 ‘의존성 우울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인이 반드시 앓을 수밖에 없는 병이다. 이제 저자는 글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삶의 방식인가? 여기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단초정도로 우리가 답해줄 수 있는 긍정적 것이 있다. 바로 상품과 쓰레기라는 일직선을 순환구조로 돌려놓은 ‘생태학’ 그리고 이러한 순환구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대 말이다. 물론 쓰레기를 생산하는 시대를 거부하는 신의 폭력의 도래나, 새로운 바틀비의 등장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정작 이런 가능성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저자는 쓰레기에 대한 분석에 몰두한 덕분에 상품을 새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그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려는 인간들,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논리를 체화한 예술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창조한 예술 역시도 그러한 새로운 쓰레기들의 양산과 폐기라는 한시성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해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예술의 긍정성이 숨어 있다. 상품으로 상품을 거부하려는 혁명적인 힘들, 상품을 상품으로 보여줌으로써 상품을 파괴하려는 역설적인 힘들 말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혁명적인 힘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조명을 전혀 하지 않는다. 현실을 분석하고 어설프게 무지개 너머의 희망을 보려는 시도를 스스로 삼가려는 사회학자로서 그의 절제력은 높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덕분에 위에서 보듯 예술을 현실적 가능성이 너무 쉽게 부정되는 것을 보면, 그의 절제는 다소 부당한 측면이 있다. 우리 삶도 결국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술이 기어이 꺾지 않은 역설적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잉여) 것 아닐까? 그는 현재 꿈틀거리고 있는 가능성까지는 조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잉여가 잉여를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꿈틀대고 있는 것도 그 가능성이 단순히 무지개 너머에 있는 희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그가 스스로 한정한 시각 때문에, 그에게 예술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한갓 상품 경제의 부산물에 그치고 말았다. 저자는 왜 이처럼 수많은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는 것일까? 이 책의 참 아쉬운 부분이다.
모더니티, 홀로코스트, 소비 사회 문제, 통합과 배제 등 현대화, 자본주의,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난제들을 정면으로 파고 들어온 사회학자인 바우만의 책이다. 이 책은 ‘쓰레기’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날 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저자인 바우만은 현대화의 역사는 진보와 생산의 역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쓰레기 생산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화 과정,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이 만들어낸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갈수록 더 많은 쓰레기가 생겨나며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생산 욕구에 이끌려 소비자들은 더욱더 빨리 상품을 소비하고,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를 요구받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은 오늘날 ‘인간 쓰레기’ 현상을 다루는 동시에 그 원인을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를 만들어가게 하는 원동력, 문화의 본성, 질서 구축 과정에 따른 포함과 배제, 지금까지 인류의 이상을 이끌어온 영원성 개념 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문화를 만들어온 메커니즘을 고려할 때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이 책을 통해서 저자 바우만이 제공하는 깊이 있는 성찰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원인파악을 위해 과학적·역사적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 탐구하는 태도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감사의 말
서문

01 태초에 설계가 있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낸 쓰레기

02 ‘그들’ 너무 많은가?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03 각각의 쓰레기는 각각의 처리장으로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

04 쓰레기 문화


옮긴이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