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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노래 : 언니네 이발관> 모든 게 잊혀져간 꿈이 되어 그 빛을 잃어가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리내어 찾지 않나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되는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건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뽑힌 전과자도 몸팔며 살아가는 여자들도 술집 여자들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발길을 돌린다 살길 없는 가요 슬픈 맘뿐인걸 잊어야 하는 가요 슬픈 맘뿐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리내어 찾지 않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더 이상 소리내어 찾지 않나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구경만 하다가 가리봉 시장. 이름도 희한하다. 구로공단이 있고 지난 시절 수출의 일등 공신이었고 지금은 패션 타운이 되었다는 그 곳이다. 사실 서울에 잠깐 살 때도 이동네에 가본 적은 없다. 구로. 이름도 좀 구리고 딱히 구경할 것도 없어 보였다. 어느새 날이 쌀랑해져 등장한 붕어빵 포장마차. 그 포장마차의 백열등 불빛에 지난달 읽었던 이 시, 박노해의 <가리봉 시장>이 빡 떠올랐다. 어느 시장에나 그렇듯이 가리봉 시장에도 많은 이들이 뭉뚱그려져 산다. 몸으로 살아가는 여자, 껀수 찾는 어깨, 뿌리 뽑힌 전과자들...... 하지만 이 시장에서 가장 빛나고 자유로운 새 같은 건 구로공단의 공돌이, 공순이들이다. 500원짜리 떡볶이와 김밥 한 접시, 생맥주 한 잔에 행복하고, 티샤쓰는 천 오백원이지만 티샤쓰로 감싼 얼굴은 귀티가 나고 물색 원피스 한 벌에 켄터키 치킨 한 접시에 2800원짜리 샌달 한 켤레에 더없이 행복할 줄 아는 지금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이다. 하지만, 가난했지만 행복했다는 신파조의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개봉한다기에 우선 반가운 마음에 예고편을 봤더니 우리 세대가 이렇게 고생한 거, 우리 자식들이 고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고 말하는 대사가 나왔다. 그래, 정치적으로도 엄혹하고 경제적으로는 어지간히도 가난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세상은 참 살기 편하다. 먹을 게 모자라나, 입을 게 모자라나. 하지만 거기까지다. 앞선 세대가 고생했던 것이 우리 자식 세대가 고생하지 않게끔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왜 그때와는 또다른 의미의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 젊은이들이 속출하고, 그나마 뭔가 해보려는 젊은이들은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이도 저도 아닌 젊은이들은 썸과 인터넷과 게임에 탐닉한다. 부모님 세대가 바랬던 성공한 삶이라는 것, 아니 평범한 삶이라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물색 원피스도, 켄터키 치킨도, 샌달 한 켤레도 결국 공돌이 공순이들은 제대로 갖지 못했다. 물론 그 때의 고생을 바탕으로 이만한 수준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켜온 건 분명하지만, 지금의 우리 세대도 제대로 된 성장을 하지 못하고 부모의 그늘에서, 또 취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기술을 개발한 청년 연구자, 농어촌에서 혼자 힘으로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가 된 소녀, 노동자의 아들이지만 온갖 경험을 바탕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청년, 해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깊이있는 학문 연구를 하고 있는 유명한 교수.......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지만 사실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걸, 말하지 않지만 학생도 선생도 서로 느낄 수 있는 그런...... 허탈하게 구경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가리봉 시장같은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에서조차 소외되는 이들도 있다. 바로 공돌이, 공순이가 되어야 하는 특성화고, 옛날 말로 전문계, 공고, 상고, 농고 아이들이다. 농업은 정부에서도 손 놨으니 할말 다 했고, 상고는 전통적으로 유명한 곳 말고는 디지털 뭐시기, 국제 뭐시기로 이름만 바꿔서 무슨 학교인지도 모르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다. 공고는 그나마 학과 이름에 특성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들이 나갈 일자리도, 업체도(특히 지방의 경우) 많지 않아서 졸업을 하면 공부도 생전 안하던 녀석들이 대학으로 도망가거나 인근 시내에서 배달의 기수로 변신하는 게 대부분이다. 가리봉 시장의 공돌이 공순이들이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렸듯 지금의 우리 학생들도 곳곳에서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린다. 배울 것 없는 장사치들이 가득한 대학으로부터 자격증을 팔아제끼는 학원으로, 취업나갈 곳 없는 차가운 노동시장으로부터 쿠폰과 삥땅이 가득한 배달 알바의 세계로. 도대체 이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가리봉 시장의 백열등은 오늘도 하얗게 빛나겠지만 백열등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첫 시집.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는 상징적인 시구로 한 시대의 아픔을 대변했던 이 책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가면서 한 시대의 정신이 됐다. 민중의 생활어로 씌었으나 지식인 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경향신문) 이 시집은 한국 문학사상 단일 시집 중 가장 많은 노래를 낳은 시집 (음악평론가 강헌)이 되었으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불가피한 하나의 지침이 되기도 (시인 고은) 하였다.

저자 박노해는 이 시집을 세상에 발표하고 곧바로 위험 인물로 떠올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각종 시국 사건의 배후 인물로 추적당했다. 노동의 새벽 은 출간과 동시에 군사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그해 말 평론가 김윤식, 임헌영은 박노해를 1984년의 시인 다섯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았다. 1988년에는 계간 문예중앙이 40명의 중견 평론가들에게 의뢰한 지난 10년간 최고의 작품 한 편 에 노동의 새벽 이 뽑히기도 했다. 1991년 그가 구속될 때까지 공식 기록은 없지만 이 시집은 최소 50만 부 이상 100만 부 가까이가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4년판은 새벽 이후 세대를 위한 어휘 해설, 그리고 시집과 시인의 역정을 정리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1. 사랑이여 모진 생명이여
하늘
멈출 수 없지
신혼일기
천생연분
이불을 꿰매면서
얼마짜리지
어디로 갈거나
한강
그리움
포장마차
가리봉시장
지문을 부른다
영어회화
썩으러 가는 길
남성편력기
모를 이야기들
통박

2. 노동의 새벽
바겐세일
시다의 꿈

졸음
휴일특근
손 무덤
어쩌면
당신을 버릴 때
진짜 노동자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노동의 새벽
어쩔 수 없지
석양

3. 새 땅을 위하여
사랑
바람이 돌더러
밥을 찾아
대결
떠나가는 노래
떠다니냐
삼청교육대 Ⅰ
어머니
아름다운 고백
별 볼일 없는 나는
장벽
허깨비

| 부록 |
해설 : 노동현장의 눈동자 / 채광석
저주받은 고전 의 기억, 얼굴 없는 시인의 얼굴 / 강무성
낱말들 : 시대의 기억